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기야마 하지메 (문단 편집) === 막장의 시작 === 육군 대장으로 승진한 스기야마 하지메는 [[하야시 센쥬로]] 내각에서 1937년 육군 대신으로 취임해 제1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 때까지 유임했다. [[만주사변]] 당시 육군 차관이었으며,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중국은 1개월이면[* 3개월 설도 있고 5개월 설도 있다. 아래 고노에 후미마로의 태평양 전쟁 관련 기록에서는 [[히로히토]]의 발언에서 "중국은 1개월 만에 정리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라고 1개월인 것으로 나온다.] 전역을 정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 주전파로 들고 일어나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적잖은 피해를 입으며 3개월 안에 중국을 정복할 수 있다더니 상하이 점령에만 3개월을 소진했고 예비역 중심으로 급히 소집된 일본군은 폭주하여 닥치는대로 학살과 약탈을 자행, [[난징 전투]]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함락한 후에 [[난징 대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외교적 중재인 [[트라우트만 공작]]은 결렬되었고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중화민국]] 정부를 상대하지 않으며, 말살하겠다는 고노에 담화를 발표해서 외교 창구까지 닫아버렸다. 일본은 [[중화민국]]을 일개 군벌 정부로 얕잡아보고 수도를 함락시켰으니 항복할 줄 알았으나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으로, 주력부대를 [[우한]]으로 옮기고 필사적으로 항쟁했다. [[일본]]에서는 중국인들의 끈질긴 저항을, 미개한 지나인들이 오만하게 일본을 업신여긴 것으로 여기고 계속 침략을 계속했다. 허나 마지막 대도시인 [[광저우]], 우한이 함락됐음에도 중국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중국의 명목상 2인자 [[왕징웨이]]를 포섭하여 괴뢰정부를 수립하여 중국의 분열을 유도한다는 [[왕징웨이 공작]]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장제스]]의 권위만 공고화되면서 전쟁은 계속 길어졌다. 스기야마 하지메는 1938년에는 장관직을 사임하면서 다시 군사 참의관을 했다가, 1938년 12월에는 북지나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산시성의 공략전을 지휘했다. 그러나 전쟁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1941년 9월, 미국의 대일 [[석유]] 수출금지 조치로 [[미국]]과의 전쟁이 계획되자 고노에 총리로부터 관련 계획을 보고받은 히로히토는 경악하여 참모총장 스기야마와 군령총장 [[나가노 오사미|나가노]]를 즉시 소환해서 해명할 것을 고노에에게 지시했다. 부름을 받고 달려온 스기야마는 [[도조 히데키]]와 함께 작전을 설명하며 '''"[[진주만 공습]] 뒤 [[미국]]은 3개월이면 [[태평양]]의 제해권을 완전히 잃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때 [[히로히토]]가 [[1928년]]의 [[황고둔 사건]]에 대해 한심한 보고를 올린 [[다나카 기이치]]에게 성질을 낸 이후로 13년 만에 이례적일 정도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스기야마 하지메의 주장을 논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현장에 배석했던 고노에가 수기로 기록한 당시의 대화 내용이 참으로 가관이다. > '''天皇'''「日米事起こらば、陸軍としては[ruby(幾許, ruby=いくばく)]の期間に片づける確信ありや」 > '''杉山'''「南洋方面だけは三箇月くらいで片づけるつもりであります」 > '''天皇'''「汝は支那事變當時の陸相なり。その時、陸相として『__事變は一箇月位にて片づく__』と申せしことを記憶す。__しかるに四箇年の長きに亙り、未だ片づかんではないか__」 > '''杉山''' (恐懼して、支那は奧地が開けてをり、豫定通り作戰し得ざりし事情を、くどくどと辨明申し上げた。) > '''天皇'''「__支那の奧地が廣いと言ふなら太平洋はなほ廣いではないか__。如何なる確信あつて三箇月と申すか 」 >---- > '''히로히토''': [[일본 제국|일]][[미국|미]] 사이에 [[태평양 전쟁|일]]이 벌어지면 [[일본 육군|육군]]은 어느 정도의 기간 안에 정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 '''스기야마''': [[남방작전|남양 방면]]만큼은 3개월 정도 안에 정리할 생각입니다. > '''히로히토''': 자네는 [[중일전쟁|지나사변]] 당시 육군대신[陸相]이지. 그때 육군대신으로서 __(지나)사변은 1개월 정도면 정리한다__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네. __그렇지만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직도 정리가 안 되지 않았나?__[* 스기야마 본인이 적은 《스기야마 메모》에서는 "예정대로 될 것 같은가? 네가 대신일 적에 [[장제스]]는 금방 항복할 것이라고 했지만 아직 못하고 있지 않나."(「予定通リ出来ルト思フカ、オ前ノ大臣ノ時ニ蔣介石ハ直グ参ルト云フタガ未ダヤレヌデハナイカ」)라고 나온다.[[https://books.google.co.kr/books?id=K_9wlFbPVd0C&pg=PT69&lpg=PT69&dq=%E7%B5%B6%E5%AF%BE%E3%83%8B%E5%8B%9D%E3%83%86%E3%83%AB%E3%82%AB+/+%E7%B5%B6%E5%AF%BE%E3%83%88%E3%83%8F%E7%94%B3%E3%82%B7%E5%85%BC%E3%83%8D%E3%83%9E%E3%82%B9&source=bl&ots=sXMRNbmxsM&sig=ACfU3U1Mt7joLkrvDDAaZ04Seqtes4ENbw&hl=ko&sa=X&ved=2ahUKEwjbzpLt7pfhAhUY7mEKHZK7AMYQ6AEwAXoECAkQAQ#v=onepage&q&f=false|(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외,《천황의 쇼와사(天皇の昭和史)》85쪽)]]] > '''스기야마''': (몹시 두려워하면서, 지나는 오지가 펼쳐져 있어 예정대로 작전이 불가능했던 사정을 구구절절 변명함) > '''히로히토''': __[[중국 대륙|지나의 오지]]가 넓다면 [[태평양]]은 더 넓지 않은가?__ 무슨 확신이 있어 3개월이라는 말을 하는 건가? >---- > '''[[고노에 후미마로]](1946),《최후의 어전회의》,[* 《최후의 어전회의 : 고노에 후미마로 공식 수기》(最後の御前會議 : 近衛文麿公手記)][* 2015년 판은 《전후 구미 견문록》까지 합쳐 《최후의 어전회의·전후 구미 견문록 - 고노에 후미마로 수기 집성》(最後の御前会議 戦後欧米見聞録 - 近衛文麿手記集成)"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7장,[* 폐하, 고함, 힐책. 스기야마 총장, 말을 잇지 못하다(陛下、励声、御詰問。杉山総長答うるを得ず)][* 1946년판 수기의 권두 목차에서는 "폐하, 스기야마 참모총장을 힐문"(陛下・杉山参謀総長を御詰問)으로 되어있다.] 東京: 時局月報社, p.43(1946)[*이미지 [br][[파일:konoe43p.jpg|width=500px]]]/p.901(2015).'''[br](밑줄은 이 문서, [[후리가나]]는 2015년 판, 한도 가즈토시(2004)[* 《[[쇼와]]사》(昭和史) 1, 박현미 역, 루비박스, 304쪽(원문 356쪽).]의 박현미 번역을 일부 수정) 스기야마 하지메는 히로히토에게 [[갈굼]]을 듣자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자 군령부 총장(軍令部総長) [[나가노 오사미]]가 "일미관계를 환자에 비유하면 수술을 해야만 하는 고비와도 같다"면서 스기야마를 거들면서 일단은 군부에서도 협상을 최우선시하고 있지만 만약에 일이 잘못될 경우 '수술'과도 같은 긴급한 조치가 환자를 살릴 수 있듯이 대책을 준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일단 군부도 외교를 최우선시하고 있다는 답변을 들은 히로히토는 일단 수긍하고 둘을 돌려보냈는데 불과 몇 달 후 일본은 미국과 전쟁에 돌입했다. 이날 히로히토는 태평양을 곧 정리할 것이라는 것 외에 그 많은 섬에 어떻게 상륙작전을 신속하게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과거 일본 해군의 모의 훈련 결과를 토대로 의구심을 표했지만 스기야마는 확실히 이길 수 있느냐는 천황의 질의에 쩔쩔 매면서 연습을 많이 했으니 훈련과는 다르지 않겠냐는 식으로 변명하다가 분노한 히로히토가 소리를 지르거나 빈정거리는 사태를 맞이하기까지 했다. [[임팔 전투|임팔 작전]]도 그렇고, 기초 공부만 한 아마추어가 수십년짜리 프로보다 더 정확한 판단력이라니 진짜로 [[답이 없다]]. [[2008년]] 일본 TBS TV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드라마 《시리즈 격동의 쇼와, 그 전쟁은 무엇이었던가 - 일미전쟁과 도조 히데키(シリーズ激動の昭和 あの戦争は何だったのか 日米開戦と東條英機)》 2부(1부는 다큐멘터리, 2부는 드라마 형식)에서 이때 히로히토와 스기야마의 대담이 그대로 등장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GC5C1Px_lxM|해당 장면]])[* 작중 [[히로히토]] 역은 [[노무라 만사이]], 스기야마 하지메 역은 히라노 다다히코(1938~2014)가 맡았는데, 해당 배우가 오페라 가수를 겸업한 터라 육군 장성으로써의 성량감 있는 대사를 소화하기 수월했을 뿐더러 배우의 키도 177cm로 실제 스기야마 하지메의 비대했던 체구와도 맞아떨어졌다고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설명된다. 여담으로 히라노 다다히코는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아니메 [[정글대제]](1965년)의 오프닝 곡을 부르기도 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1zu9JHiYKvE|#]]][* 이 대화 직후에 나오는 "맹세코 이길 수 있겠나!" - "맹세코라고는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絶対ニ勝テルカ / 絶対トハ申シ兼ネマス) 부분은 《스기야마 메모》(杉山メモ)에 나온다.[br][[파일:sugiyama2.jpg|width=50px]]] 사실 [[태평양]]은 겨우 [[중국]]보다 넓은 정도가 아니라 '''지구상 모든 육지를 더한 것보다 넓다.''' [[태평양]]은 [[바다]] 총 면적의 약 절반, [[지구]] 전체 면적의 약 3분의 1, [[러시아]]의 약 10배, [[중국]]의 약 17배에 이른다. 그래도 그를 위해 실드를 쳐준다면, 바다는 육지와는 다르게 높이가 일정하고 장애물이 없기에 같은 면적이라면 바다를 관리하기가 더 쉬울 수는 있다. 어디까지나 '''같은 면적의 바다라면.''' 뭐, 그 결과는 모두가 알 것이다. 일단 [[진주만 공습]] 이후 석 달간 남방에서만큼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인도|영국령 인도]]와 교전할 정도였지만, [[태평양]]에서는 알다시피 밀리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